모든 형태의 장인 예술을 위한 공간, 폰다치오네 드리스 반 노튼
모든 형태의 장인 예술을 선보이고 양성하는 공간, 폰다치오네 드리스 반 노튼이 탄생했다.
15세기 베네치아 팔라초에 사무실을 두겠다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바로크풍 인테리어와 어우러진 고딕 양식의 파사드, 대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앤티크 납유리의 비포라(Bifora, 두 개로 나뉜 형태) 창문, 호화로운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보석 같은 곳이다. 한때 가면무도회를 위해 초에 불을 밝히고, 파우더를 잔뜩 뿌린 가발과 풍성한 태피터 파니에 드레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북적이던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Palazzo Pisani Moretta)의 로코코 살롱은 이제 드레스 반 노튼이 다음 행보를 구상하는 무대가 되었다. 2024년 6월, 그는 38년 동안 운영해온 자신의 브랜드에서 사임했다.
2025년 5월 반 노튼은 대운하에서 가장 장관을 이루는 공간을 공식적으로 매입했다. 2017년 필리프(Filip) 벨기에 국왕으로부터 ‘벨기에 패션과 문화에 크게 기여한 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은 그가 이런 장소에서 패션 다음의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지극히 걸맞게 느껴진다. 물론 반 노튼은 그 작위를 자신이 만든 실크 자카드만큼 가볍게 받아들인다. ‘폰다치오네 드리스 반 노튼(Fondazione Dries Van Noten)’ 설립이라는 더 중대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파트너 패트릭 반겔루위(Patrick Vangheluwe)와 함께 오랫동안 구상한 삶의 두 번째 장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는 팔라초를 창의성과 장인 정신의 문화적 동력 장치로 삼아 프레젠테이션, 협업, 레지던시, 위성 프로젝트, 그리고 학생과 신인 제작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장소로 사용하는 것이다. 자체 재원으로 운영하는 비영리 문화 기관은 2026년 4월 첫 번째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문을 연다.
우리는 반 노튼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공간을 채운 옅은 분홍과 흐린 파랑이 뒤섞인 석고 음영은 그의 런웨이에 올랐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베네치아에 대한 그의 애정, 공예에 대한 헌신, 패션계를 향한 그리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이 베네치아로 이끌었나요? 숨이 멎을 만큼 멋진 도시지만, 이동이 쉽지 않은 곳이죠. 개인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베네치아에서 모험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야기는 7~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59세가 됐을 때 앞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드의 미래, 패트릭과 나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브랜드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브랜드를 접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정체성이 매우 강했고, 누군가 자신의 색을 더하면서도 기존 스타일을 가져갈 수 있는 요소도 많았습니다. 아카이브는 완성돼 있었고, 앤트워프 팀의 대다수가 20년, 25년, 심지어 35년 동안 함께해왔기에 브랜드에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었죠. ‘미안, 내가 65세라서 그만둬야겠어, 안녕’ 하고 떠나는 건 너무 정직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65세가 되는 해에 물러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모님이 옷 가게를 운영하셔서 열두 살 때부터 바잉 출장을 따라다니며 자랐어요. 50년 넘도록 패션이 내 삶을 차지해왔으니, 이제는 그 밖의 다른 세상이 궁금해진 거죠. 팬데믹으로 인해 계획이 1년 정도 미뤄지는 바람에 65세가 아닌 66세에 은퇴하게 됐지만요. 2024년에야 드디어 “좋아, 이제 멈추고 다른 걸 해보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에겐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당연히 아이디어가 넘쳐났겠죠. 어떤 것들이었나요?
우리는 늘 이탈리아를 사랑해왔습니다. 아말피 해안에 여름 별장을 갖고 있을 정도니까요. 음식도, 사람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이탈리아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종종 그렇듯 예상치 못한 행운도 있었죠. 한 친구가 벨기에에 있는 우리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그녀가 말하더군요. “베네치아에 내 아파트가 있는데, 며칠 머물지 않을래?” 그렇게 시작된 로버트 카스텐(Robert Carsten)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졌고, 우리는 결국 호텔 대신 아름다운 팔라초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게 됐어요. 그때부터 갑자기 베네치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베네치아는 주말에 동물원 구경하듯 소비됩니다. 건물 외관, 기념엽서, 곤돌라 정도죠. 하지만 아파트에 머물게 되자, 아름다움 아래 숨겨져 있던 도시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자부심 강한 베네치아 사람들, 활기찬 시장, 훌륭한 생선 가게와 정육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어갈 준비가 된 젊은 세대까지 말이죠. 베네치아는 단순히 추억의 도시가 아니었어요. 활기가 넘치고, 학교와 학생들이 있으며, 저 아래 숨겨진 창의적인 움직임이 들끓는 곳입니다. 뉴욕이나 런던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트렌디함을 과시하지도 않아요. 그 다층적이고 미묘한 마법을 느끼려면 그 삶에 깊이 스며들어야 해요. 우리는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스스로를 ‘정원 중독’이라 묘사합니다. 실제 벨기에 리르(Lier)의 집에는 아름다운 정원도 있죠. 베네치아가 당신이 사랑하는 장미의 경쟁 상대가 되나요?
사람들이 종종 리르의 정원이 그립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베네치아는 운하도 많고 좋은 곳이죠. 그렇지만 당신의 정원은요?”라고 말이죠. 당연히 그립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원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유는 고요하고, 걸을 수 있고, 교통 체증이 없기 때문이에요. 자동차도, 트럭도, 신호등도, 소음도 없죠. 놀랍게도 베네치아는 그와 매우 비슷한 것을 제공합니다. 이곳에는 자동차도 없고, 하루를 방해하는 교통 체증도 없어요. 그저 물과 빛, 숨 쉴 수 있는 공간뿐이죠. 나는 베네치아를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라고 여깁니다. 햇살이 스며든 팔라초, 수면에 반짝이는 반사광, 탐험하기 좋은 숨겨진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죠. 물론 장미가 정확히 언제 피는지 아는 감각이 그립고, 여전히 리르의 정원을 찾기도 합니다. 반려견 스코트(Scott)도 그곳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베네치아의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더 느리고 여유롭지만, 도시는 생기로 가득해요. 전시, 콘서트, 행사, 그리고 친구 집에서의 저녁 식사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 끊임없이 이어지죠. 고요함과 생동감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폰다치오네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폰다치오네에 대한 아이디어는 아주 단순한 열망에서 출발했습니다. 패트릭과 나는 유의미한 일을 하고 싶었어요.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우리는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일해왔지만,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하나의 붉은 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장인 정신이죠. 나는 늘 자수에 매료됐어요. 인도에 오래 머무는 동안 공장보다는 마을 장인들과 일했습니다. 콜카타(Kolkata)처럼 이미 과밀한 도시에 사람을 더 유입시키지 않으면서 그들의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죠. 유럽에서 작업할 때도 접근 방식은 같았습니다. 이탈리아 코모에서 손으로 채색한 의상을 작업했고, 1920년대 나무 베틀로 직물을 짜는 프랑스 리옹의 소규모 공방과 함께했습니다. 언제나 인간의 수작업, 손 기술, 각각의 옷을 유일하게 만드는 미묘한 불완전함을 높이 평가하죠. 내게는 만드는 행위 그 자체가 언제나 이야기의 일부였습니다. 정성스럽게 꿰맨 라펠, 공예 기술이 돋보이는 가시적인 디테일, 모든 옷에 들인 시간과 노력 전부요. 장인 정신은 언제나 내 브랜드의 근간이었습니다. 패트릭과 나는 이 열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어떻게 탐구할 수 있을지 자주 얘기했어요. 베네치아는 여러 세대에 걸쳐 공예가 이어지고, 일상 속에서 장인의 기술이 살아 움직인다는 점에서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폰다치오네 드리스 반 노튼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죠. 모든 형태의 장인 예술을 선보이고 키워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말입니다.
장인 정신은 보여주기 식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 단어만으로 패션 산업을 획일성에서 구원할 것처럼 말이죠. 진정성과 정체성을 보증하는 부적으로 삼는 이들도 많고요. 여전히 실제 사용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유행어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장인 정신이란 뭘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유리나 도자기 공예, 주얼리 세공, 바구니 짜기처럼 매우 좁게 정의합니다. 나는 훨씬 넓은 범위로 이해하죠. 장인 정신이란 영혼과 생각, 의도를 담아서 만든 모든 것입니다. 요리사가 음식에 창의성을 쏟아붓고, 조향사가 원료를 조합하고, 재단사가 옷을 바느질하는 것뿐 아니라 배관공이 기발한 해결법을 고안해내는 것도 장인 정신이 될 수 있어요.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손과 사고에 따라 작업한다면, 거기에는 장인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가 모든 움직임을 일일이 지시한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 그것이 폰다치오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다양한 방식과 목소리를 포용하는 공간. 나는 디자인할 때 늘 대비되는 것의 결합을 즐겼습니다. 스트리트와 꾸뛰르, 에스닉과 역사적 요소를 뒤섞어 조화로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거죠. 집도 마찬가지예요. 동네 앤티크 마켓에서 우스꽝스러운 플라스틱 장신구를 발견하는 것도, 문장이 새겨진 18세기 베네치아 은식기를 발견하는 것도 똑같이 즐겁습니다. 아름다움은 오직 금전적 가치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니까요. 또한 우리는 ‘최상위 수준’의 장인이나 학생에게만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중간 집단, 주목받지 못한 이들, 실험적인 무리, 다양한 배경과 연령대, 접근 방식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 과정을 더 모험적이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 테니까요. 우리에겐 정말 많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 점은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2014년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처음 공개되고, 2015년 앤트워프에서 다시 선보인 전시 <드리스 반 노튼: 영감(Dries Van Noten: Inspirations)>은 시각적 자극이 굉장했으니까요.
우리는 충분한 공간이 있고, 다행히 아이디어도 풍부합니다. 그렇다면 왜 전시라는 형식에 국한해야 할까요? 시작은 프레젠테이션이 될 겁니다. 패션, 회화, 음악, 그리고 다양한 예술 공예 장르의 유명 인사들이 재능 있는 젊은 인재와 어우러지는, 일종의 우아하고 정적인 쇼케이스죠. 이것이 우리 방식입니다. 폰다치오네의 역할 중 하나는 ‘연결자’입니다. 베네치아는 이미 공예에 전념하는 단체로 가득해요. 공공기관부터 독립 단체, 글라스 위크(Glass Week)부터 국제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Homo Faber)까지요. 그들과 경쟁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협업하고, 힘을 모으면서, 어떤 새로운 방식이 부상할지 지켜보고 싶죠. 장인 정신은 예술과 공예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진정으로 아름다워지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예술적 공예’라고 부르죠. 이 팔라초 안에서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음악원 학생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를 초대할 수도 있고, 유명 뮤지션이 젊은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죠. 방문객은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며 각 공간마다 다른 목소리나 악기를 만나고, 젊은 연주자들이 10분씩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어떤 방에서는 베네토 출신의 젊은 와인 제조자가 와인 한 잔을 권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이런 조합을 상상합니다. 공간이 있으니 활용해서 그 아름다움을 나눠야죠.
잘나가는 패션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지녔던 과거의 긴장감이 그립진 않나요? 당신이 직접 일군 그 하우스와도 여전히 이어진 느낌인가요?
패트릭과 나는 아직 브랜드의 뷰티와 향수 라인, 우리가 디자인한 매장의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밀라노, 브뤼셀, 런던의 새로운 공간, 뉴욕의 또 다른 프로젝트까지 신경 쓰며 계속 바쁘게 지내고 있죠. 컬렉션에 대한 고문 역할도 이어가고 있어요. 줄리앙 클라우스너(Julian Klausner)는 미팅 때마다 작업 중인 것을 보여주고, 우리는 의견을 나누죠. 자문의 좋은 점은 상대방이 조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유쾌하게 무시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 역시 그 반응을 정말 쉽게 받아들여요. 솔직히 말하면 이제 내가 꼭 필요하지 않아요. 그의 작업은 이미 매우 강렬합니다. 7년 동안 함께 일했기 때문에 그는 충분히 알고 있어요. 자문이 필수는 아닐지 몰라도, 그가 질문할 때면 언제든 기꺼이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패션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여전히 당신만의 방식으로 패션계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지금의 위치에서 바라본 패션 산업은 어떤가요? 뭐가 변했을까요?
‘산업’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지점이 정확히 잘못됐습니다. 패션은 산업이 되는 순간 영혼을 잃어요. 우리 브랜드가 성장할 때조차 스스로 다른 종류의 패션 하우스라고 여겼습니다. 일반적인 시장 규칙을 따르길 거부하는 것이었죠. 사람들도 그걸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작업은 늘 상업 논리 대신 우리가 옳다고 느낀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벨기에에 기반을 둔 덕분에 패션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서커스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죠. 종종 우리만의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반항심 때문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거였어요. 모든 것을 할 만큼 재정적 여력이 없기도 했고요.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패션쇼와 광고 캠페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어서 쇼를 선택했어요. 그런 제약이 우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각적으로 힘 있고 차별화된 런웨이가 하우스의 언어가 된 거죠.
최근 패션계에 일어나는 소란과 동요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여전히 흥미로운가요, 아니면 그 회전목마에서 내려온 지금이 더 좋은가요?
물론 여전히 패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티유 블라지,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작업이 보고 싶어요. 구겐하임 미술관에 새로운 전시를 보러 가는 것처럼 말이죠. 패션은 우리 문화의 일부고, 언제나 거울처럼 세상을 투영해왔습니다. 오늘날의 패션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단지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비즈니스로 변화한 모습 또한 그렇고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디자이너들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패션이 반드시 거대한 기계일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젊은 세대와 작은 아이디어, 개인이 운영할 수 있는 규모의 매장과 스튜디오를 위한 공간이 다시 생겼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앤트워프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어시스턴트가 될 수 있는지 물었어요. 2024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손으로 스웨터를 만들며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리는 방법을 묻더군요. 이런 변화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재봉사가 되는 것을 꿈꾸는 학생들도 있어요. 도시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면서, 아이디어를 들고 찾아오는 고객과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드리스, 패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시절이 그립진 않나요?
전혀요. 패션 자체가 그립진 않습니다. 패션은 이제 훨씬 더 커다란 우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과거엔 패션에 너무 집착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많은 창조적 언어의 하나로 바라봅니다. 요즘 나를 사로잡는 것은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이에요. 빈티지와 하이 스트리트를 섞고, 기본 아이템에 몇 가지 특별한 요소를 더하고, 오래된 옷과 새 옷을 함께 입어요. 그것이 진짜 스타일입니다. 디자이너가 정해주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기보다는 옷을 통해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정말 마음에 듭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