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연애소설] 박상영의 ‘쿨톤의 사랑’
연애도 일종의 판타지라면,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는 쪽을 택하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호한 사랑의 감각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고 더듬는 김기태, 김초엽, 민지형, 박상영, 원소윤, 장강명,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초단편소설처럼.
쿨톤의 사랑
문을 닫고 출발하려고 하는 마을버스를 막아섰다. 멈춰 선 버스의 앞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막차이기 때문인지 꽤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 바로 뒤 좌석만 하나 남아 있어 얼른 그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검은 코트에 깃털 하나가 붙어 있어 떼어냈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사람치고는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잠깐 졸았다.
눈을 떠보니 버스가 어느덧 종점에 멈춰 서 있었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일어났다. 기사의 얼굴이 생각보다 너무 하얗고 어려 보여 입가에 살짝 고여 있던 침을 얼른 닦았다. 기사가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너무 곤히 주무셔서 못 깨웠어요.”
“죄송해요. 퇴근하셔야 할 텐데.”
“아, 아니에요. 손님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퇴근은 못해요.”
“왜요?”
“얘기하자면 좀 긴데··· 제가 사실 귀신이거든요.”
듣고 보니 하얗게만 보였던 얼굴이며 손가락이 실은 조금 명도가 옅다는 게 느껴졌다.
“어, 정말 귀신 맞으시네요.”
“네, 네. 정신을 차려보니까 여기서 운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퇴근도 못하고.”
“퇴근을 왜 못하세요? 저 같이 조는 사람들 때문에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일종의 지박령 같은 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리 귀신이라도 노동권은 좀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근데 별로 힘들진 않아요. 원래도 운전을 좋아했거든요. 버스 기사 같은 거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왜요?”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버스 기사는 정해진 노선만 가야 하는데요? 심지어 마을버스는 코스도 되게 짧고 한정적인데···”
“그러니까요. 죽고 나서야 알게 됐다니까요. 생전 버스를 타봤어야 알지···”
“버스를 못 타봤다고요? 죽기 전에 재벌··· 뭐 그런 거였어요?”
“아예 못 타본 건 아니고요. 꽤 오래 못 탔어요. 아이돌이었거든요.”
“어쩐지 비율이 남다르시긴 했어요. 그런데 어쩌다 돌아가시게··· 된 거예요?”
기사는 골똘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마지막 앨범의 투어를 돌다가 이 마을 어귀에서 교통사고가 난 것 같다고 했다.
“투어라니··· 멋있다.”
“생각하시는 돔 투어 이런 거 아니고··· 그냥 동네 강당이나 오일장 같은 데를 도는 걸 투어라고 불렀어요. 마지막 공연도 요 앞에 배드민턴장에서 했고요.”
“아···”
“그렇다고 너무 불쌍하게 보지는 마세요. 많이들 좋아해주셨거든요. 매번 찾아오시는 분들이··· 서른 명 정도? 작은 마을 하나 정도 규모는 됐어요.”
“그래서··· 마을버스 기사가 되신 건가? 세계 투어를 도는 아이돌이었으면 파일럿 같은 게 됐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게요. 운명에도 정해진 사이즈 같은 게 있나 봐요.”
“비행기보다는 마을버스가 덜 고단할 거 같기는 해요. 운전하기엔.”
“맞아요. 밤에는 이렇게 앉아서 놀 수도 있고. 가끔 승객분들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다 주시기도 하고요.”
“직접 뽑아 드실 수는 없는 거예요?”
“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버스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네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딱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열려 있는 하차 문으로 나가 서둘러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왔다. 기사는 다소 투명한 손으로 커피잔을 받아 들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커피를 쭈욱 들이켰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사가 내게 말했다.
“따뜻하고, 맛있네요.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제 몸이 이런지라 뭘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노래를 한 곡 불러주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기사가 운전석으로 돌아가 카 오디오를 켰다. 버스에 MR이 울려 퍼지자 기사가 춤을 추며 한 곡을 끝까지 불렀다. 다소 격렬한 춤이었음에도 힘든 기색은 없었다. 평온한 기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눅눅했던 기분이 조금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기사에게 말했다.
“매일, 막차 때마다 커피 한 잔을 뽑아줄게요. 대신 저한테 노래 한 곡씩 불러주면 어때요?”
“저희 제작비가 모자라서··· 타이틀곡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안무 없는 노래도 괜찮아요. 수록곡도 좋고요. 다른 가수들 커버곡을 불러줘도 돼요.”
“그건 가능해요.”
“그럼 약속해요. 하루 한 곡. 나를 위해 노래 불러주기.”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기사의 투명한 손가락에 내 손가락이 겹쳐지자 색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아무래도 그의 퍼스널 컬러가 쿨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VK
박상영 은 단편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허균문학작가상과 젊은작가상을 수상했으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작으로 선정되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며 주목받았다. 또한 10대의 사랑을 다룬 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 사회 초년생을 중심에 둔 <믿음에 대하여> 등 폭넓은 세대의 사랑과 낭만을 그려내며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