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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과 ‘보그’의 만남, 100년 역사를 담은 ‘샤넬 인 보그’ 출간

연대기를 줄줄 외우는 타입은 아니지만, 역사를 들춰보는 일은 좋아합니다. 따로 알고 있던 두 이름이 교차하는 순간이 흥미롭거든요. 이를테면 가브리엘 샤넬과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의상을 공동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처럼요.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들의 첫 장면을 엿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패션 브랜드가 예술가와 협업하고, 잡지가 사진가를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가로 키워내는 구조 역시 누군가가 도전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게 되죠.

2000년부터 2025년까지 7개국 ‘보그’ 커버에 오른 샤넬. Courtesy of Thames & Hudson
사진가 구본창이 기록한 '보그 코리아' 2016년 1월호 화보. 수주가 샤넬 2016 크루즈 컬렉션을 입고 있다. Courtesy of Thames & Hudson
사진가 김희준이 기록한 '보그 코리아' 2022년 7월호 커버. 지드래곤이 샤넬 2022 공방 컬렉션을 착용했다. Courtesy of Thames & Hudson

이번에 출간한 <샤넬 인 보그(Chanel in Vogue)>가 그 출발점을 정리합니다. 샤넬과 <보그>가 몸담아온 패션계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끌어안아왔습니다. 그 분야에서 샤넬은 무엇을 바꾸었고, <보그>는 그 변화를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영국 아트 북 전문 출판사 테임스 & 허드슨(Thames & Hudson)은 이 질문에 두 권짜리 시리즈로 화답합니다. 1권은 패션 역사가 레베카 C. 투이트(Rebecca C. Tuite)가 1910년부터 1982년을, 2권은 사진 전문가 수산나 브라운(Susanna Brown)이 1983년부터 2025년을 다룹니다.

가브리엘 샤넬은 패션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1939년, 샤넬은 달리와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de Monte Carlo) 무대의상을 제작합니다. 발레 뤼스는 20세기 초 유럽 예술계를 뒤흔든 실험적 발레단으로,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예술가도 참여했던 무대입니다. 샤넬이 이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은 패션이 단순히 ‘의식주’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가장 빠르게 기록해온 매체가 바로 <보그>였죠.

샤넬이라는 이름이 <보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3년 1월 15일입니다. 무대 위 배우가 착용한 ‘검은 새틴 모자’ 일러스트레이션이 지면에 실렸죠. 샤넬은 모자 디자인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연극 ‘은둔한 악마(Le Diable Ermite)’ 무대에 오른 배우 가브리엘 도르지아(Gabrielle Dorziat)를 위해 모자를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장 콕토 ‘안티고네’ 의상 제작, 발레 뤼스 ‘르 트랭 블뢰(Le Train Bleu)’, 달리와의 협업까지 이어집니다.

블랙 새틴 소재에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는 1913년 ‘보그’에 처음 등장한 샤넬 디자인입니다. 프랑스 배우 가브리엘 도르지아가 착용했습니다. Courtesy of Vogue

샤넬은 예술가를 후원한 디자이너인 동시에 무대 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불러온 ‘코코 샤넬’이라는 별명 역시 카바레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 노래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니까요. 샤넬이 브랜드이기 전에 인물로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도, 이 선명한 캐릭터 덕분일 겁니다.

샤넬은 여성 의복 생활에 변화를 불러온 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샤넬 이전, 폴 푸아레(Paul Poiret)는 20세기 초 코르셋을 약화하고 직선적인 실루엣을 제안했습니다. 샤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남성복에 쓰던 저지 소재를 도입했으며, 활동성을 고려해 주머니를 달았습니다. 모조 주얼리를 고급스럽게 연출하며 값비싼 보석 중심의 위계를 흔들기도 했죠. 1957년 <타임>은 샤넬이 ‘장르 포브르(Genre Pauvre)’를 발명했다고 평했습니다. 직역하면 ‘가난한 스타일’이지만, 값비싼 장식 대신 절제된 디자인과 태도로 새로운 럭셔리를 정의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당시 여성 패션은 사치의 전시물이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샤넬은 여성을 단상에 올려두지 않고, 현실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았죠.

칼 에릭슨이 그린 가브리엘 샤넬. Courtesy of Vogue
콘데 몽로즈 나스트. Courtesy of Condé Nast

이 변화가 자리 잡도록 도운 것이 <보그>였습니다. 1909년 콘데 몽로즈 나스트(Condé Montrose Nast)가 <보그>를 인수한 이후, 잡지는 패션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넘어 문화 플랫폼으로 확장됩니다. 1935년 <보그>는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에게 샤넬 16 버튼 장갑과 가방, 초커를 그리게 했습니다.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은 “<보그>를 루브르로 만들어달라”고 청했고, 호스트 P. 호스트(Horst P. Horst)는 콘데 나스트의 후원이 패션 사진을 독립 장르로 성장시켰다고 회고했습니다. 단순히 옷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옷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적 시도를 한 셈이죠.

1935년 ‘보그’는 뛰어난 현대미술가 중 한 명인 조르조 데 키리코에게 여성의 필수품, 즉 샤넬 16 버튼 장갑, 가방, 초커를 그려달라고 의뢰했습니다. Courtesy of Vogue

1926년 <보그>는 샤넬 블랙 드레스를 ‘샤넬 포드(The Chanel Ford)’라고 소개했습니다. 자동차 브랜드 포드가 대량생산을 통해 ‘누구나 탈 수 있는 차’라는 상징이 되었듯, 이 드레스 역시 전 세계 여성이 입을 기본 유니폼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죠. 훗날 ‘리틀 블랙 드레스’로 불리는 이 디자인은 실제로 현대 여성의 기본값이 됩니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샤넬이 만들어낸 변화를 정확히 짚은 비유가 됐습니다.

1926년, '보그'는 '샤넬 포드, 전 세계인이 입을 드레스'라고 기록했습니다. Courtesy of Vogue
가브리엘 샤넬이 포드 자동차에 시동을 건 지 100년 후, 마티유 블라지가 샤넬 하우스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오뜨 꾸뛰르 컬렉션인 2026 봄/여름 컬렉션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Courtesy of Vogue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에서 돌아온 샤넬은 1954년 복귀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냉담했지만, 미국은 열광했습니다. 이 온도 차는 오히려 샤넬을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다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5년 뒤 <보그>는 ‘샤넬 파워’가 파리와 미국을 정복했다고 보도하며 그녀를 ‘한 필 천으로 작업한 가장 위대한 개인주의자’라 칭했습니다.

1969년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이 브로드웨이 뮤지컬 <코코>에서 샤넬을 연기했습니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무대 위 주인공이 될 만큼, 샤넬은 문화적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칼 라거펠트가 하우스를 맡으며 또 다른 전환이 시작됩니다. 칼은 전통적인 트위드 수트에 유머와 반항을 더하며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여기서도 <보그>의 역할은 분명했습니다. 새로 발굴한 사진가의 시선을 통해 샤넬을 과거 유산이 아닌, 현재 스타일로 계속 번역해냈죠.

1892년 창간된 <보그>는 1916년 영국, 1920년 프랑스 에디션을 출범하며 글로벌 매체로 확장했습니다. 1999년부터 2020년까지 15개 에디션을 추가로 론칭하며 세계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죠. 매체 확장은 곧 이미지 확장이었고, 샤넬 역시 그 지면을 통해 새로운 시장과 세대를 만났습니다. 스타일닷컴(Style.com) 등장, 코스튬 인스티튜트(Costume Institute) 샤넬 전시,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 부상까지. 2018년 타일러 미첼(Tyler Mitchell)이 최초의 흑인 <보그> 커버 사진가가 된 사건 역시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 한 장면이었습니다.

'보그'가 1954년에 기록한 샤넬 룩. '샤넬 서프라이즈: 1954. 샤넬이 평생 믿어온 모든 것을 담은 수트. 어깨선이 각지고 살짝 패딩 처리한 네이비 블루 울 샤넬 저지 소재, 2개의 패치 포켓, 접어 올릴 수 있는 소맷단, 활동성을 고려한 옆주름 스커트, 세탁 가능한 흰색 머슬린 블라우스(실제 소맷단과 단추가 있으며, 앞뒤로 탭이 스커트에 연결됨), 젊은 감각의 턴다운 칼라, 그리고 목 부분의 젊은 리본 장식.' Courtesy of Vogue
샬롬 할로는 샤넬의 1996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테일러 튜튜를 착용했습니다. 칼 라거펠트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이번 컬렉션은 샤넬 특유의 감성에 유머와 펑크 요소를 가미한 샤넬다운 컬렉션입니다. 샤넬에 대한 오마주이면서도 재치 있는 반전이 담겨 있죠." Courtesy of Vogue
스티븐 마이젤이 기록한 샤넬 1986 가을/겨울 오뜨 꾸뛰르 의상을 입은 크리스티 털링턴 번즈. Courtesy of Thames & Hudson

2019년 버지니 비아르는 여성의 시선으로 샤넬을 이어갔고, 2024년에는 마티유 블라지가 하우스를 이끌며 또 다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1926년 <보그>가 ‘샤넬 포드’라 부른 드레스가 등장한 이후 정확히 100년이 지난 2026년, 샤넬과 <보그>의 관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한 컷 이미지가 나타나기 전까지 누군가 처음 도전했고, 그 선택을 기록하고 증폭한 지면이 있었습니다. <샤넬 인 보그>는 샤넬이 왜 샤넬이 되었는지, <보그>가 왜 <보그>로 남았는지 지난 시간 위에 겹쳐 보여줍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름들이 다시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순간을 목격해보세요.

Courtesy of Thames & Hudson
Courtesy of Thames &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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