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무렵 상하이 한인은 500명에 불과했다. 러시아 연해주엔 10만명 이상 살았고, 하와이에는 5000명 가까운 한인이 있었다. 재정 및 군사 지원을 고려한다면 상하이는 임시정부를 두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국제정치논총'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왜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의 행정·사법권을 인정한 지역)에 수립되었나'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논증했다. 당시 상황에서 외교 독립 노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종전 이후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