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두나, “안전하지 않은 길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여전하다”
25 그때그때 흐름에 맡기듯 현재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여전히 처음처럼 연기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데뷔한 지 25년이나 지났다고 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잘 버텼구나.’ 이 정도면 칭찬 좀 해줘도 될 것 같다. 기특하다고.
<플란다스의 개> 길거리 캐스팅으로 패션지 모델로 데뷔하고, 인기를 얻으며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할 기회도 많아졌다. 요즘은 K-팝 아이돌이 맡는 음악 방송(MBC <음악캠프>) MC도 해봤다. 화려하게 치장된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나에게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맨얼굴로 출연한 <플란다스의 개>(2000)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나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 데려다줬고,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안전하지 않아 보이는 길을 선택하면 얻는 게 있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은 여전하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걸 해보고 싶은 갈증이 늘 있다.
코리아 10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몰랐고, 그들 앞에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오징어 게임>이나 <기생충>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도 많아졌고, 글로벌한 K-팝 스타들도 많고, 나 하나 때문에 한국에 대한 편견을 가질 일은 없을 거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나 영화인이 인정받는 걸 보면 자랑스럽다. 나랑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작품이라 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업계가 인정받는 거니까, 동료로서 기분 좋은 일이다.
직업관 악기처럼 쓸모가 있음을 인정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잘 쓰여야 오래갈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배우라는 직업이 운동선수 같다고도 생각한다. 운동선수의 고된 훈련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몰라도 배우 역시 계속 연마해야 하는 직업이고, 촬영에 돌입하는 순간 경기가 시작된 것처럼 느껴진다. 축구 선수가 골을 넣을 때와 같은 강렬한 희열을 느낄 때도 있다.
여자들의 이야기 여성 감독이 만드는 작품을 무조건 선택해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지만 상업적으로 분류된 작품에서 여성 감독을 만날 기회는 확실히 드물다. 여성 감독이나 여자 배우가 중심이 된 영화가 주류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남성 감독이나 남자 배우에 비해 상업적인 티켓 파워가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상황을 만회하는 사례가 드문 이유가 무엇일지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편이다. 독립 영화계에는 훌륭한 여성 감독이 많다. 상업 영화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사례가 늘었으면 좋겠다. 내 입장에서도 뭘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2001)나 <도희야>(2014), <다음 소희>(2023)는 그런 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필모그래피다.
패션과의 상관관계 예쁜 걸 좋아할 뿐 패션에 대해 깊이 아는 건 아니다. 그런데 가까이서 접해보니 예술의 경지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건축에서 영향을 받아 창조하는 디자인도 있고, 그런 크리에이티브한 면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왠지 우울한 날은 근사하게 차려입거나 꾸미면서 기분 전환을 시도하곤 한다. 물론 연기할 때는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하는 희열이 크다. 패션 화보 촬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걸 연기로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게 밸런스를 맞추며 사는 거다. (VK)